발제: 87회 초청강연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몸의 지향성과 스포츠-

 

김영필 (울산대 철학과 연구교수, 철학박사)



아롱은 자신의 컵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보라고, 자네가 현상학자라면 이 칵테일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걸세. 그리고 그것이 바로 철학인 것이지!》

사르트르는 감동으로 새파래졌다. 거의 새파래졌다고 해도 좋았다. 그것은 그가 오랫동안 바라고 있던 바에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즉 사물에 대해서 말하는 것, 그가 접하는 그대로의 사물을……, 그리고 그것이 곧 철학인 그런 것을 그는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레이몽 아롱이 몽빠르나스의 어느 까페에서 사르트르와 보봐르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나눈 대화이다. 이 대화는 온갖 추상적인 철학에 식상해 있던 프랑스 지성인들이 칵테일 컵과 같은 지극히 가까운 현실에 대해 말해 주는 현상학을 지적 탈출구로 맞아들이는 장면을 담고 있다. 우리의 주제인 ‘신체’에 관한 담론 역시 이러한 출발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신체’라는 사태 자체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근대과학에 의해 잘못 읽혀진 ‘신체’는 인간의 영혼과 대립해 있는 객체로서의 하나의 사물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영혼과 대립해 있는 객관화된 신체는 생리학자가 문제 삼는 하나의 육체일 뿐이다. 모든 근대과학적 편견을 허물고 만난 신체는 의식과 떨어질 수 없는 신체로서의 주관이다. 

 체육은 인간의 신체 활동에 관한 학문적 연구이다. 전통적인 체육학은 신체활동에 관해 실증적으로 관찰하여 그것으로부터 일반적 법칙을 귀납적으로 추론하는 데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근대 이후의 인간 신체 활동에 관한 연구는 ‘신체’를 객관적 관찰의 대상으로 설정하면서 출발하였다. 마치 신체를 하나의 사물처럼 물상화(物象化)하여 다루는 전통적인 방법은 결국 인간의 신체를 일종의 물리적 기계와 같은 대상으로 규정한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인 방법은 인간의 신체를 일종의 물리적 기계인 육체와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신체(Leib)는 육체(Körper)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만약 인간의 신체활동을 단순한 육체의 물리적 움직임으로 규정한다면, 체육학은 결국 인간마저 기계로 다루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신체활동을 체력향상이나 승리위주의 체력 다듬기를 위한 양적 지수화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 이는 결국 인간의 신체활동이 가지는 ‘의미’를 추상해버리고 단지 기계적 움직임으로 규정하게 된다. 말하자면 인간 신체활동의 구체성을 근대과학의 추상적 방법으로 사상시켜 버리는 소위 화이트헤드의 ‘구체성을 추상적 원리 뒤에 두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왜냐하면 신체활동은 단순한 기계적 움직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체활동(Leistung)은 그 자체가 의미를 부여하고 구성하는 지향적 활동(Intentionalität)이다.  신체 활동은 단순한 물리적 운동이 아니기에 지향적 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의미구조를 해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 글은 신체의 지향성의 해명을 통한 스포츠 현상학(Sports-Phenomenology)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려는 의도에서 쓰여 진 글이다.



 현상학은 에드문드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에 의해 창안된 방법론이다. 이 ‘현상학’(Phänomenologie)이란 술어는 ‘현상’과 ‘학’이란 두 개념으로 합성된 단어로서, “어떤 것이 그것이 드러나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기술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떤 사태가 왜곡됨이 없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상황을 연상하면 좋을 것이다. 신체에 관한 왜곡된 해석, 즉 근대 과학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읽혀진 신체는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과 같은 육체이다. 신체를 영혼의 외피와 같은 것으로 이분법적으로 읽어온 근대철학의 스캔들은 이미 플라톤 이후 오래 지속된 공식적 교설(official doctrine)이다. 플라톤은 신체를 영혼을 가두고 있는 무덤(soma)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고, 이것을 가장 정교한 방식으로 정리한 사람이 근대철학자 데카르트이다.


  비록 아마도 내가 밀접하게 결합되는 신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내가 사유하고 있고 연장되지 않는 것인 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을 갖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연장된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립하는 한, 나는 신체에 대한 판명한 관념을 갖기 때문에, 나 즉 나에게 본질적인 것으로서의 마음은 전적으로 그리고 확실히 신체로부터 구분되는 것이며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성찰》, 156면).


 이처럼 데카르트는 마음을 사유하는 실체(res cogitans)로, 신체를 연장하는 실체(res extensa)로 이분법적으로 분리한다. 이에 대해 길버트 라일(G.Ryle)은 데카르트는 마음과 신체의 관계를 마치 “기계(신체) 속의 유령(마음)”처럼 잘못 다룬다고 비판한다. 현상학자 후설은 근대과학에 의해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3류 철학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철저하게 새롭게 철학하기를 주문한다.


  … 미리 주어진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말고, 전해져 오는 어떠한 것도 그 출발점으로 tkaq지 않으며, 아무리 위대한 대가라도 그 명성에 현혹되지 않고…
(《임밀학으로서의 철학》, 340면)  


 이와 같은 후설의 요구는 근대과학의 방법론에 의해 추상된 직접 경험의 학적 권한에 대해 다시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직관적으로(말하자면 생생한 현실성 속에서) 제시되는 모든 것을 그것이 주어져 있는 그대로 또한 주어져 있는 한계 내에서만 단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무런 전제 없이 단지 생생한 경험에로 다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하기를 주문한다. 근대과학에 의해 설정된 전제들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읽혀진 상황은 바로 “모든 대상은 어떻든 의식체험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의식에 절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바로 현상(Phänomen)이다. 이처럼 신체 역시 의식과 분리되어 있는 단순한 물체(육체)가 아니라 이미 의식과 분리될 수 없이 상관적으로 짝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현상학적으로 읽혀진 신체는 영혼의 외피가 아니라 바로 영혼이 육화(肉化)된 모습이다. 오래된 이분법적 가설을 걷어내고 들여다 본 신체는 바로 영혼의 다른 얼굴이다. 영혼이 육화되어 나타난 모습이 신체이기에, 이제 더 이상 신체는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육체와 같은 것은 아니다. 신체와 영혼은 하나의 텍스트로 짜여져 있다. 그러나 근대과학에 의해 신체가 관찰의 대상으로 규정되면서, 주관에 대립해 있는 하나의 객체로서 성격 지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가설을 허물고 의식과 신체가 하나의 텍스트임을 읽어내기 위한 현상학의 전략은 ‘지향성’(Intentionalität)에서 발견된다. 지향성은 의식은 항상 그리고 이미 대상에로 향해져 있음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의식은 항상 무엇에 관한 의식이다. 의식이 항상 대상에로 향해져 있다면, 그 의식은 바로 신체-의식이다. 신체를 채널로 하여 의식은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의식이 신체를 수단으로 하여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는 말에 대해 신체를 의식의 소유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의식 자체가 신체이다. 이제 신체는 의식을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 기계와 같은 아니라, 의식의 대변자로서 대상세계와 부단히 교섭하면서 의식과 세계 사이에서 ‘의미’를 구성하는 지향성의 축이다. 이제 의식의 지향성은 다름 아닌 ‘신체의 지향성’이라는 구체적 활동을 지칭하게 된다.



 우리가 체육학이나 무용 혹은 레저 등을 인간의 단순한 물리적 운동에 관한 연구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인간은 신체활동을 통해 부단히 의미를 지향하고 부여하는 작용을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신체활동의 의미지향(Noesis)과 이 지향에 의해 구성된 의미(Noema)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스포츠 현상학의 가능성은 바로 신체의 지향성에 근거한 의미 분석에서 찾아야 한다.

 신체의 활동은 그 자체가 의미지향활동으로서 무엇을 ‘의미’로서 성취해내는 활동(Leistung)이다. 신체를 통해 일어나는 운동감각은 단순한 물리적 운동만이 아니다. 신체활동은 단순히 물리적으로만 움직이는 수동적인 운동이 아니라, 자유로이 움직이면서 외부세계를 지각하는 운동감각이다. 이 운동감각은 Kinästhese로서 kines(운동)과 aisthesis(감각)의 합성어이다. 우리가 신체의 지향성을 통해 스포츠현상학의 학문적 가능성을 확인하려고 한다면, 신체 활동으로서의 운동감각 역시 자유롭게 사물을 지각하려는  합목적적 활동임을 인식해야 한다. 모든 신체적 활동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목표를 향한 활동이다. 안구를 돌려 사물을 보려고 할 때나 손을 펴서 사물을 집으려고 할 때, 그리고 멀리서 보이지 않을 경우 가까이 가서 보려는 신체적 움직임 등등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자유롭게 움직여서 목표에로 향할 수 있다는 합목적성이 신체의 운동성에 깔려 있다. 그러므로 신체 활동은 자유로운 의지기관인 신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지향적 활동이다. 원반던지기나 달리기 혹은 테니스와 레저나 무용 등은 신체적 활동을 통해 무엇을 의미부여하는 작용이며, 아무리 단순한 운동감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무엇을 지향하고 목표로 하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신체적 운동이 단순한 육체적 운동(physical movement)이 아니기에, 신체적 행위를 통해 현현되는 그 행위자의 정신적 ‘의도’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메를로 퐁티는 후설이나 사르트르가 ‘신체’를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신체보다는 의식쪽에 무게중심이 있음을 비판한다. “의식이 신체를 통해 무엇을 지향한다”는 표현에는 신체를 의식의 표현수단으로 생각하는 오래된 가설이 묻어 있다. 그리고 사르트르가 의식을 대자존재로 규정하여 사물인 즉자존재와 구분하면서 의식을 사물과는 다른 자유존재로 규정한다. 이 역시 아직 사물에 대립해 있는 ‘의식’이라는 낡은 이분법적 교설을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퐁티는 그의 《지각의 현상학》에서 사유하는 자아에 앞서 이미 세계를 지각하면서 부단히 교섭하는 자아인 신체적 자아를 부각시키고 있다. 세계와 분리되어 있으면서 세계의 의미를 구성하는 주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이미 그리고 항상 세계와 교섭하면서 세계-내-존재로 던져져 있는 자아는 바로 신체로서의 자아이다.          



 신체활동이 단순한 물리적 행위가 아니기에, 그 행위를 통해 현현되는 의미구조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신체활동을 수행하는 자의 의미지향 구조가 스포츠나 무용을 통해 드러난다면, 물리적 운동에 대한 과학적-통계적 접근 방법은 한계를 갖는다. 신체를 통해 지향되는 주체적 의도에로 접근하는 방법은 객관적 법칙에 의한 설명이 아니라, 개개의 주체적 체험 연관에 대한 기술이고 더 나아가서는 이해이며 해석이다. 모든 스포츠 현상이 물리적 (자연) 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개체적-주관적 체험 현상이라고 한다면, 객관적 설명에 앞서 체험연관에 대한 기술이 중요하다. 즉 객관적인 법칙 하에 포섭될 수 없는 신체활동의 주관적 체험구조를 기술하는 것이 일차적이다. 기술(Deskription)은 설명과 달리 조작이 아니다. 설명(explanation)은 일정한 법칙을 가정하고, 거기에다 짜맞추는 일종의 조작이다. 만약 신체를 통해 표현되는 스포츠나 무용의 행위가 행위자 개개인의 주관적 체험현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에 대한 객관적 설명은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개념적-논리적 설명에 앞서서 만나야 할 의미구조이기 때문이다. 이 의미구조에로의 접근은 현상학적 기술이며, 상호감정 이입을 통한 이해이고 해석이다. 이것은 내담자(client)중심의 상담이론이 구체적이고 개체적인 실존적 문제를 경험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하려는 근대 상담심리학의 방법에 대한 저항에서 생겨난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현상학의 근본 모토인 “사태 자체로!”라는 격률과 ‘현상학적 환원’이 가진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과학적 편견을 환원하고 혹은 괄호쳐두고 생생하고 원본적인 체험에로 돌아가서 다시 물으려는 현상학의 구호는 당시의 과학제국주의에 의해 정신조차 사물로 취급되는 상황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현상학은 근대 실증주의에 의해 초래된 인간성의 위기를 진단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철학적 대안이다. 학문의 이념을 단순한 사실학으로 정초하여 온 자연과학과 자연과학의 이념을 정신분야에 적용시킴으로써, 정신을 마치 자연처럼 다룬 근대 과학주의적 편견을 극복하는데 현상학의 근본이념이 있다. 후설은 학문의 위기는 바로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분리된 채 스스로 사실학으로 전락되고 나아가서는 인간마저 사실-인간을 만드는 데 있다. 근대의 학문의 이념은 가능한 한, 주관성과 거리를 두고 하나의 객관적인 학문을 구축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근대 물리학적 객관주의는 바로 학문의 이념을 그 자체 완벽한 체계를 가진 학으로 정당화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 활동 역시 단순히 심리학이나 생리학과 같은 개별적인 학문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인간의 신체활동이 의식과 별개의 물리적 운동이 아니라면, 신체활동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스포츠 역시 단순한 심리학이나 생리학이라는 객관적 학문의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스포츠 체험 현상은 하나의 객관적인 법칙에 의해 총체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주관적인 고유한 체험이라고 한다면, 이에 대한 계량적 접근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S.Kleinman에 의하면, “주체적 인간의 신체활동에 대한 본질성은 인간 움직임을 하나의 계량적 대상으로 다루기에는 너무도 다각적이고 다원적인 국면과 상황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김영환․김동규․신현군․함정혜․안용규․권욱동 공저, 《체육철학》, 연세대학교출판부, 2002, 230면).

 이와 같은 점에서 보면, 스포츠 현상학의 학적 가능성은 바로 신체활동에 대한 극단적인 계량적 접근이 가지는 문제점을 폭로하면서, 계량화될 수 없는 경기 행위자의 고유한 체험의 의미구조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있다. “승리지상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계량화의 가치 수용과 강조 속에서, 수행자인 선수들의 생생한 주관적 경험(subjective experience)의 가치는 기껏해야 차선의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같은 책, 231면 참조). 이와 같은 문제상황에서 스포츠현상학은 생생한 삶의 체험에 토대를 둔 소위 생활세계적 스포츠를 지향한다. 하나의 객관적 학으로 체계화된 근대 체육학이 망각한 혹은 소외시킨 생활세계적 체험구조를 드러내어 체육학의 본질로 다시 읽어내는 것이 스포츠현상학의 근본주제이다. 물론 객관적 학으로서의 체육학의 가치를 폐기처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객관적 학으로서의 체육학과 그것을 토대지우고 있는 생활세계(Lebenswelt; life-world)의 학적 연관성을 새롭게 읽어냄으로써, 실증주의적 폐단이 남긴 유산을 극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지금까지 신체활동에 대한 지향적 분석을 통한 스포츠현상학의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인간의 신체활동이 가지는 의미지향 구조에 대한 이해를 통해 체육학을 단순한 객관적 학문(생리학이나 심리학)으로 다루어왔던 입장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살핀 것이다. 하나의 객관적 학문으로서의 체육학은 그 토대를 생생한 체험구조로 짜여진 생활세계에 두지 않으면 하나의 형식적인 학문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활동의 본질 구조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의식적 체험구조에로의 환원을 통해 본질-체육학을 정초하려는 현상학적 입장은 또 하나의 문제점을 노출하지 않을 수 없다. 전통적인 체육학에 대한 체육현상학의 지나친 알러지반응은 결국 체육의 본질을 체험구조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초하려는 또 하나의 토대주의(foundationalism)에 이르고 만다. 체육학의 본질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현상-본질이라는 낡은 이분법을 다시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영원한 본질을 탐색해왔던 전통철학(Philosophy)이 그 생명력을 소진하면서, 결국은 ‘철학’(philosophy)이라는 기호 역시 다른 기호와의 구조적 관계 속에 서 있는 하나의 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한 포스트모던적 저항에 자리를 물려 줄 수밖에 없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현상학과 해석학에 대립하면서, 어느 하나의 보편적 본질에 정착하려는 토대주의적 발상이  무모한 키메라 사냥에 지나지 않음을 인식한다면, 신체활동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통해 의미구조를 해명하려는 본질-체육학 역시 기호학적 관점에서 다시 읽혀져야 한다. 신체활동에 대한 분석을 통해 체육학의 본질을 추상하려는 스포츠 현상학은 결국 체육학/사이비체육학사이의 경계를 인위적으로 구획할 수밖에 없다. ‘신체’라는 기호를 걷어내고 만나야할 보편적 의미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신체’라는 기호의 의미는 다른 기호와의 관계 속에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활동에 의해 지향된 보편적 의미구조를 해명하는 현상학적 입장은 ‘신체’라는 기호의 의미를 앞서서 결정짓고 있는 객관적 구조를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신체’에 관한 기호학적 담론은 기호(언어)이전의 체험구조로 환원하여 그 속에서 보편적 의미(본질)를 길어내려는 현상학적 전략은 모더니즘의 적자이다. 그러므로 ‘신체’라는 시니피앙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은 보편적 시니피에에 대한 향수를 더 이상 품지 않는다. 신체를 통해 그때그때 주어지는 시각적-청각적 이미지들이 품어내는 의미(곧 사라져버릴 것이지만)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보편적 시니피에는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체육학’이란 기호 역시 다른 기호와의 구조적 관계(변별적 차이성)를 통해 그 의미가 생성될 뿐이기에, ‘체육학’이란 시니피앙 바깥에 존재하는 시니피에는 실재하지 않는다. 체육학의 본질을 정초하려는 토대주의적 발상을 포기할 때, 모든 것이 체육학이 될 수 있다는 다원주의적 시각이 가능할 것이다. 근대과학의 본질주의에 저항하여 “모든 것이 다 과학일 수 있다”는 파이어아벤트의 포스트모던적 과학관처럼, 포스트모던적 관점에서 읽혀진 체육학 역시 “무엇이든지 다 좋다”는 다원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메시지를 내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어진 맥락을 벗어나 본질을 추상하려는 모던적 기획이 미완성으로 끝난 이상, 다양성과 우연성을 예찬하는 포스트모던적 전략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